기관이 사용할 수 있는 블록체인 프라어버시란?
sm-stack · 2026.05.19 · Research
블록체인이 실제 금융 인프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핵심 과제로 떠오른 ‘기관용 프라이버시’의 필요성과 기술적 진화를 다룹니다. 모네로, 지캐시, 토네이도캐시부터 FHE, 프라이빗 체인, Privacy Boost까지 주요 접근법을 비교하며, 규제 준수, 자기 커스터디, 퍼블릭 체인 컴포저빌리티를 함께 만족하는 프라이버시 인프라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기관이 사용할 수 있는 블록체인 프라이버시란? 1. 블록체인+기관, 인프라는 준비되었는가? 2026년 현재 블록체인은 실제 금융 인프라로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이는 기존 금융 시스템의 핵심 플레이어들의 최근 행동으로 엿볼 수 있다. 2026년 2월 블랙록(BlackRock)은 약 22 24억 달러 규모의 토큰화 미 국채 펀드 BUIDL을 유니스왑(Uniswap)에서 거래 가능하게 만들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DeFi 프로토콜을 공식 채택한 것이다. 앞서 2025년 11월에 제이피모건(JP Morgan)은 퍼블릭 L2 체인 베이스(Base)에 예치 토큰 JPMD를 정식 출시하며, 주요 은행으로서는 최초로 실제 자금을 퍼블릭 블록체인에 올렸다. 그리고 2026년 3월 한 주 사이에 마스터카드(Mastercard)는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 BVNK를 최대 18억 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발표했고, 스트라이프(Stripe)와 패러다임(Paradigm)이 합작한 결제 전용 블록체인 템포(Tempo)의 메인넷이 출시되었다. 즉 자산운용사, 상업은행, 카드 네트워크, 결제 플랫폼 등 주요 행위자가 같은 시기에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규제 역시 이 전환을 뒷받침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2025년 7월 서명된 미국 GENIUS Act와 EU의 MiCA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 대한 1:1 준비금 의무, 정기 공시, 감사 요건 등 유사한 정책을 기반으로 블록체인 위 활동들을 규제 바운더리 안에 포함시키려고 하고 있다. TRM Labs에 따르면 2025년 검토된 주요 30개 관할권 중 70% 이상이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진전시켰고, 80% 이상의 관할권에서 금융기관이 디지털 자산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규제 불확실성이 채택의 가장 큰 장벽이었던 시기는 끝났고, 이제 문제는 '어떠한 형태로 블록체인을 사용할 것인가'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전환의 장벽이 되는 것은, 프라이버시이다. 금융은 본래 기밀성을 기본값으로 설계되어 있다. 개인의 잔고, 은행의 지급준비 포지션, 자산운용사의 매매 의도, 기업 간 정산 내역 등, 이들이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순간 개인의 프라이버시 유출뿐만 아니라 프론트러닝, 시장 조작, 경쟁 정보 유출이 즉시 발생한다. 반면 퍼블릭 블록체인은 모든 트랜잭션이 영구 원장에 공개되는, 정반대 원칙 위에 세워졌다. 기관이 퍼블릭 블록체인을 실제 금융 인프라로 쓰려면, 기본값으로 설계된 '완전한 투명성'을 규제 환경에 맞게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블록체인 프라이버시’ 문제는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여러 프로젝트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해 왔다.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밀어붙인 프로젝트, 영지식 증명을 통해 선택적 프라이버시를 구현한 프로젝트, 이더리움과 DeFi 위에서 프라이버시를 가능하게 하려 한 프로젝트, 그리고 최근에는 규제 환경까지 고려하며 프라이버시와 감사 가능성을 함께 다루려는 시도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그 흐름을 따라가며 블록체인 프라이버시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고, 실제 규제 환경에 가장 적합한 솔루션이 어떤 형태일지 알아본다. 2. 블록체인 프라이버시의 첫 해법: 독립 체인이 보여준 가능성과 한계 2.1 모네로(Monero): 프라이버시를 기본값으로 모네로는 사실상 최초의 '프라이버시 네이티브' 블록체인이다. 2012년 크립토노트(CryptoNote)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2014년 출시된 이래, 현재까지 가장 오래 운영되는 프라이버시 블록체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모네로를 이해하려면 UTXO(미사용 트랜잭션 출력) 개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UTXO는 블록체인이 잔고를 기록하는 방식 중 하나로, 각 사용자의 자금을 단일한 계좌 잔액 하나로 관리하는 이더리움과 달리, 지갑 안의 '지폐' 단위를 낱개로 추적한다. 이 구조에서는 각 단위를 독립적으로 다룰 수 있어, 뒤에서 살펴볼 링 서명처럼 '내 지폐를 다른 사람의 지폐들 사이에 섞어 넣는' 기법이나 '정보 공개 없이 소유권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기법을 적용하기 유리하다. 비트코인과 마찬가지로 모네로는 이 UTXO들을 머클 트리로 관리하는데, 이 구조는 이후 지캐시와 EVM 기반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설계 패턴이 된다. 2.1.1 3중 레이어 프라이버시 아키텍처 모네로의 프라이버시는 세 개의 독립된 레이어로 구성된다. 링 서명(Ring Signature) : 발신자 모호화를 위해 모네로에 도입된 구조이다. 트랜잭션 발신자는 자금을 전송할 때, 체인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15개의 '위장' 출력값을 묶어 실제 UTXO와 함께 16개짜리 링을 구성한다. 외부 관찰자는 16개 중 하나가 진짜 발신자임을 알 수 있지만,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특정할 수 없다. 스텔스 주소(Stealth Address) : 수신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장치이다. 발신자는 수신자의 공개 주소로 직접 자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공개 주소에서 일회용 수신 주소를 도출한 다음, 거기로 자금을 보낸다. 이 일회용 주소는 체인에 기록되지만 원래의 공개 지갑 주소와 연결되지 않으며, 수신자만이 자신의 비밀 키로 이를 식별하여 받은 자금을 사용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RingCT : 금액 은폐를 위해 2017년 도입된 구조이다. 페데르센 커밋먼트(Pedersen Commitment)와 범위 증명을 통해, 금액을 랜덤 숫자처럼 보이는 '커밋먼트' 형태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상태에서도 거래 전후 금액 총합이 일치하는지, 금액이 유효한 범위 안에 있는지를 모두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금액이 얼마인지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다. 이 세 레이어를 통해 모네로 트랜잭션에서 드러나는 정보는 16개의 '발신자 후보', 일회용 수신자 주소, 그리고 알 수 없는 금액 커밋먼트뿐이다. 모네로와 같은 UTXO 구조가 프라이빗 전송에 특히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더리움과 같은 계정 기반 구조는 '이 주소에 얼마가 있다'는 잔고 자체를 상태로 저장하기 때문에, 금액을 숨기거나 발신자를 섞는 방식을 적용하기가 구조적으로 훨씬 까다롭다. 2.1.2 프라이버시와 사용성의 트레이드오프 모네로는 이를 통해 강력한 수준의 프라이버시를 달성했지만, 이 때문에 사용성 측면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모네로에서는 각 출력마다 발신자가 생성한 일회용 공개 키만 체인에 기록되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수신자를 알 수 없다. 대신 수신자 본인은 자신의 뷰 키와 해당 출력에 첨부된 트랜잭션 공개 키로 계산을 수행해, 이 UTXO가 자신에게 온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출력이 자기 것인지 미리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지갑이 체인의 모든 UTXO에 대해 이 계산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갑을 한 달 동안 열지 않았다가 다시 켜면 그동안 쌓인 약 21,600개 블록 분량의 UTXO 전부를 처리해야 한다. 2022년 8월 도입된 뷰 태그(View Tag)로 스캐닝 시간이 30 40% 이상 단축됐지만, 구조적 부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발신 쪽 역시 복잡하다. 모네로 지갑은 전송 전에 로컬에서 디코이 15개 선택, 일회용 스텔스 주소 생성, 금액 인코딩, 범위 증명 생성, 링 서명 생성을 순차적으로 수행한다. 이 모든 연산이 완료된 후에야 트랜잭션이 노드로 제출된다. 결국 모네로의 프라이버시 보장은 중앙 서버나 신뢰할 수 있는 제3자 없이 수학적으로 달성되지만, 그 계산 부담은 전부 사용자 기기 위에 올라와 사용자 경험 저하로 이어진다. 이는 모네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이 공통적으로 마주하는 구조적 병목이다. 2.1.3 뷰 키(View Key): 선택적 감사의 가능성과 한계 모네로에는 뷰 키라는 선택적 공개 메커니즘이 있다. 뷰 키 보유자는 특정 지갑으로 들어온 입금 내역과 금액을 복호화할 수 있어, 세금 신고, 기부 증빙, 내부 회계 점검 같은 용도에 활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프라이버시를 기본값으로 유지하면서도 필요 시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 다만 모네로의 뷰 키는 공개 범위를 세밀하게 조절하는 도구라기보다 지갑 전체의 수신 내역을 열람하게 하는 포괄적 접근 권한에 가깝다. 특정 기간, 거래 상대방, 혹은 금액 범위를 한정해 보여주는 식의 제한적 공개는 지원되지 않는다. 2.1.4 모네로가 남긴 것 모네로는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도 발신자, 수신자, 금액을 강하게 보호하는 전송 시스템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음을 가장 일관되게 보여준 사례이다. 동시에 모네로는 이 프라이버시를 얻기 위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높은 클라이언트 측 연산 부담은 사용성을 떨어뜨렸고, 선택적 공개도 세밀한 범위 지정보다는 포괄적 열람에 가까웠다. 즉, 모네로는 강력한 프라이버시를 갖춘 체인 중 하나이지만, 다양한 자산 활용과 정교한 감사가 함께 요구되는 환경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2.2 지캐시(Zcash): zk-SNARK로 설계된 선택적 프라이버시 2.2.1 최초의 zk-SNARK 기반 블록체인 2016년 일렉트릭 코인 컴퍼니(Electric Coin Company)가 만든 지캐시는 최초로 zk-SNARK(영지식 간결 비대화형 논증)를 도입한 프라이버시 블록체인이다. zk-SNARK는 "이 거래는 유효하다"는 사실을 거래의 어떤 내용도 드러내지 않고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기술이다. 지캐시에서 이는 프라이빗(shielded) 트랜잭션을 전송할 때 사용된다. 프라이빗 트랜잭션을 생성하는 지갑은 다음 네 가지 사실을 zk-SNARK 증명 하나로 나타낸다. 존재성 : 전송하려는 자금이 트리에 실제로 존재한다 소유권 : 그 자금을 소비할 권한을 가진 키를 보유하고 있다 미사용 : 그 자금은 이미 소비된 적이 없다 잔액 보존 : 입력 금액의 합과 출력 금액의 합이 일치한다 지캐시 노드는 발신자, 수신자, 금액을 전혀 알 수 없으며, 이 ZK 증명 하나만 검증하면 된다. 이 접근은 모네로와 비교했을 때, 익명성의 범위를 크게 넓힌다. ZK로 보장되는 익명성 집합은 지캐시 내 프라이빗 풀에 존재하는 모든 UTXO이며, 2016년부터 누적된 전체 UXTO를 포함된다. 모네로에서 링 서명은 ‘16개 후보 중 하나’라는 확률론적 모호성에 의존하지만, 지캐시의 zk-SNARK는 ‘발신자와 금액에 관해 어떤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수학적 보장을 제공한다. 2.2.2 지캐시의 데이터 구조: 노트, 커밋먼트, 널리파이어 지캐시의 프라이빗 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데이터 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노트(Note) & xB294; 비트코인의 UTXO에 해당한다. 수신자 주소, 금액, 무작위성을 담은 데이터 구조로, 지갑이 로컬에 복호화하여 보관하지만 체인에는 평문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노트 커밋먼트(Note Commitment) & xB294; 노트의 해시다. 체인 내 풀에는 노트가 아니라 이 커밋먼트만 기록되며, 커밋먼트만 봐서는 노트 내용을 알 수 없다. 새 노트가 생성될 때마다 커밋먼트가 머클 트리에 추가되는데, 이 트리는 2016년부터 누적된 모든 노트의 커밋먼트를 담고 있다. 널리파이어(Nullifier) & xB294; 이중 지불을 막기 위해 도입된 장치다. 지캐시의 각 노트는 고유한 널리파이어와 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노트를 소비할 때 발신자는 연결된 널리파이어를 체인에 공개하며, 노드들은 이 널리파이어가 이전에 등장한 적 있는지 확인해 있으면 이중 지불로 거부한다. 핵심은 널리파이어만 봐서는 어떤 노트가 소비됐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널리파이어와 커밋먼트 사이의 연결은 zk-SNARK 증명 안에 숨겨져 있고, 외부에는 널리파이어만 공개된다. 2.2.3 트랜잭션 생성 흐름 지캐시에서 프라이빗 트랜잭션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1. 발신자 지갑은 소비할 노트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머클 증명을 계산한다. 2. 수신자를 위한 새 노트를 생성해, 수신자의 공개 키로 암호화한 뒤 트랜잭션에 첨부한다. 3. 사용할 노트의 널리파이어를 계산하고, 머클 경로 / 개인 키 / 노트 내용 / 널리파이어 / 금액을 기반으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사실을 동시에 증명하는 zk-SNARK 증명을 생성한다. 4. 완성된 트랜잭션은 체인에 새 커밋먼트, 소비된 노트의 널리파이어, 그리고 zk-SNARK 증명만을 남긴다. 발신자, 수신자, 금액 모두가 수학적으로 보장된 형태로 숨겨진다. 이 구조는 이후 EVM 위의 프라이버시 솔루션들의 암호학적 기반이 된다. 2.2.4 전체 뷰 키: 감사 가능성의 진전 지캐시는 2018년 전체 뷰 키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선택적 프라이버시 모델을 구체화하였다. 전체 뷰 키 보유자는 특정 지갑의 수신 내역뿐 아니라 지출 내역을 포함한 거래 이력 전반을 열람할 수 있다. 모네로의 뷰 키가 주로 수신 내역 중심의 공개에 머물렀다면, 지캐시의 전체 뷰 키는 공개 범위를 계정 전체의 흐름으로 한층 넓힌 셈이다. 여기에 더해 지캐시는 거래 공개 증명(payment disclosure)이라 불리는 거래 단위 공개 기능을 별도로 제공한다. 이는 계정 이력 전체를 노출하지 않고 특정 거래 하나에 대해서만 수신 주소, 금액, 암호화된 메모 등의 정보를 상대방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ZIP-302를 통해 표준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지캐시의 선택적 공개는 계정 단위(전체 뷰 키)와 거래 단위(거래 공개 증명)의 두 축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사용자는 회계 점검, 내부 감사, 규제 준수 검토, 분쟁 해결 등 상황에 따라 공개 수위를 달리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이원 구조에도 불구하고 공개 방식은 여전히 이분법적이다. 전체 뷰 키를 공유하면 계정의 모든 이력이 열리고, 거래 공개 증명을 발행하면 해당 거래 하나만이 공개되는 식이다. 특정 기간, 거래 상대방, 특정 자산에 한정해 접근 범위를 자동으로 필터링하거나,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거래군에 대해서만 열람 권한을 위임하는 식의 세분화된 접근 제어는 프로토콜 차원에서 제공되지 않는다. 감사 대상자가 여러 건의 거래를 선별적으로 공개하려면 각 거래마다 지불 공개를 개별 생성해 전달해야 하며, 이는 대규모 감사 환경에서 운영상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2.2.5 지캐시가 남긴 것 지캐시는 zk-SNARK를 블록체인에 처음 배포했고, 여러 번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ZK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이후 스크롤(Scroll)과 같은 이더리움 롤업에서 변형된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노트 + 커밋먼트 + 널리파이어로 이루어진 UTXO 기반 쉴디드 풀 구조는 이후 EVM 위의 프라이버시 프로토콜들이 반복적으로 차용하는 표준 패턴이 되었다. 그러나 지캐시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는 프라이버시 기술 자체가 아니라, 지캐시가 프로그래밍 가능성이 낮은 별도의 체인이라는 것이다. 지캐시 위에는 스마트 컨트랙트가 없기 때문에, 유니스왑과 같은 거래소, 아베와 같은 대출 플랫폼, 토큰화된 RWA가 존재할 수 없다. 프로그래머빌리티가 없는, 단순 전송 하에서의 프라이버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증명 생성이 사용자 기기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성능의 문제가 남아있다. 잔액 확인을 위해 체인 전체의 노트를 스캐닝해야 하는 구조적 부담도 여전하다. 모네로와 지캐시가 공통적으로 보여준 결론은, 격리된 독립 체인에서는 자산의 활용 범위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시도는 이 한계를 이어받아, 프라이버시를 독립 체인이 아닌 EVM 위에서 구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3. EVM 위의 프라이버시: 믹서에서 DeFi 통합까지 3.1 토네이도 캐시(Tornado Cash): 최초의 비수탁 온체인 믹서 토네이도 캐시는, 2019년부터 이더리움 메인넷 위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대표 믹서로 동작해왔다. 토네이도 캐시는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동작한다: 1. 사용자는 고정 금액(0.1, 1, 10, 100 ETH 중 하나)을 스마트 컨트랙트에 입금한다. 2. 입금 시 사용자는 로컬에서 무작위 비밀값과 널리파이어를 생성하고, 이 둘의 해시를 커밋먼트로 계산해 컨트랙트의 머클 트리에 추가한다. 비밀값과 널리파이어 원본은 사용자만 보관한다. 3. 출금 시 사용자는 다른 주소에서 zk-SNARK 증명을 제출한다. '나는 이 머클 트리에 포함된 커밋먼트 중 하나의 비밀값을 알고 있고, 해당 널리파이어를 공개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4. 컨트랙트는 증명을 검증하고 널리파이어가 이전에 사용된 적 없음을 확인한 뒤 고정 금액을 출금 주소로 전송한다. 외부 관찰자는 '누군가가 1 ETH를 넣었고, 누군가가 1 ETH를 뺐다'는 것 밖에 볼 수 없다. 입금과 출금 간 시간 간격이 충분하고 그 사이 다른 입출금이 빈번하게 이뤄진다면, 외부 관찰자가 둘 사이의 연결을 추정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토네이도 캐시는 암호학적으로 잘 설계된 시스템이었지만, 구조적 한계가 존재하였다. 우선 고정 금액 풀은 지정된 단위 외의 금액을 처리할 수 없었다. 3.7 ETH를 프라이빗하게 전송하려면, 여러 풀에 걸쳐 다수의 입출금을 반복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금액 패턴이 노출될 수 있다. 또한 ETH 외 토큰은 별도 풀이 배포되어야 했으며, 이더리움 메인넷에서는 DAI, cDAI, USDC, USDT, WBTC 등 6개 토큰만 지원됐다. 무엇보다 토네이도 캐시 클래식은 입금과 출금만 가능한 믹서 모델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즉, 풀 내부에서 다른 주소로 전송하거나 DeFi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21년 12월 토네이도 캐시 노바(Nova)가 출시되어 임의 금액과 풀 내부 전송을 지원했으나, 노바는 베타에 머물렀고 2022년 8월 제재 이전까지 클래식 풀이 압도적 사용량을 유지했다. 그리고 토네이도 캐시는 스마트 컨트랙트 수준에서 제재 주소 스크리닝, 감사인 접근 경로, 자금 출처 증빙 같은 규제 준수 메커니즘을 강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토네이도 캐시는 해커들의 자금 세탁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2022년 4월 토네이도 캐시 팀은 체이널리시스의 OFAC 제재 지갑 차단 오라클을 프론트엔드에 통합하고 자금 출처 증빙을 위한 컴플라이언스 도구도 제공했지만, 이 조치들은 모두 UI 수준에서만 작동했다. 누구든 스마트 컨트랙트와 직접 상호작용하면 이를 우회할 수 있었다. 프로토콜 자체에 내장된 규제 준수 메커니즘의 부재는, 이후 토네이도 캐시가 규제 리스크에 취약해지는 배경이 됐다. 3.1.1 OFAC 제재와 그 여파 2022년 8월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토네이도 캐시를 제재 목록에 추가했다. 이는 미국의 금융 제재가 사람이나 기업이 아닌 오픈소스 스마트 컨트랙트에 적용된 최초의 사례였다. 이유는 북한의 자금 세탁에 사용되었다는 이유였으며, OFAC는 토네이도 캐시가 출시 이후 북한 해킹 그룹 라자루스(Lazarus Group)가 연루된 70억 달러 이상의 암호화폐 세탁에 사용되었다고 밝혔다. 제재 즉시 USDC 발행사 서클(Circle)은 토네이도 캐시와 상호작용한 주소의 USDC를 동결했고, 이더리움 블록 빌더와 릴레이는 토네이도 캐시와 연루된 주소들을 검열하기 시작했으며, 깃허브는 토네이도 캐시 리포지토리와 개발자 계정을 삭제했다. 주요 DeFi 프론트엔드들와 RPC 서비스도 토네이도 캐시와 상호작용 이력이 있는 주소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개발자에 대한 형사 처벌도 이어졌다. 공동 개발자 알렉세이 페르체프(Alexey Pertsev)는 2022년 8월 네덜란드에서 체포돼 2024년 5월 자금세탁 방조죄로 64개월(5년 4개월)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공동 창업자 로만 스톰(Roman Storm)은 2023년 미국에서 기소되어 2025년 7월 뉴욕 남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시작했으며, 2025년 8월 배심원단은 무면허 자금 송금업 운영 공모 혐의에 대해 유죄, 자금세탁 공모 혐의와 제재 위반 공모 혐의에 대해서는 평결 불능(미결심)으로 일부 유죄 평결을 내렸다. 한편 2024년 11월 미국 제5연방순회항소법원은, 판결에서 토네이도 캐시의 불변 스마트 컨트랙트에 대한 OFAC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불변 스마트 컨트랙트가 IEEPA(국제비상경제권법)에서 정의하는 '재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OFAC는 2025년 3월 토네이도 캐시를 제재 목록에서 해제했다. 다만 개발자들에 대한 형사 절차 등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에 대한 규제 리스크 자체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이 남긴 핵심은 프라이버시 기능 자체보다도, 합법 사용자와 불법 사용자를 프로토콜 레벨에서 구분하지 못하는 구조가 얼마나 큰 규제 리스크로 인식되는지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프로젝트들은 이 교훈을 바탕으로 '규제 준수'를 고려한 설계를 적용하게 된다. 3.2 레일건(Railgun): DeFi와 통합된 프라이버시 시스템 image.png Source: Railgun 2021년 출시된 레일건은 토네이도 캐시의 한계를 넘어, 고정 금액 믹서 모델 대신 임의 금액을 처리하고, 모든 ERC-20 토큰을 지원하며, 입금 및 출금만 가능했던 구조 대신 쉴딩된 상태에서 DeFi 프로토콜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레일건의 구조는 지캐시에서 영감을 받은 이더리움 위 UTXO 기반 쉴디드 풀 시스템이다. 사용자가 토큰을 레일건 컨트랙트에 입금(shield)하면 해당 잔액은 노트로 변환되어 쉴디드 풀 내 머클 트리에 들어간다. 이후 사용자는 쉴딩된 상태에서 다른 레일건 사용자에게 전송하거나 공개 주소로 출금할 수 있다. 쉴디드 풀 내에서 다른 주소로 전송할 때, 지갑은 '내가 소유한 노트가 머클 트리에 존재하고, 해당 노트와 연결된 널리파이어가 사용된 적 없으며, 인풋과 아웃풋의 잔액이 일치한다'는 zk-SNARK 증명을 생성한다. 이 증명은 브로드캐스터라 불리는 제3자의 공개 주소를 통해 온체인에 제출되며, 실제 발신자, 수신자 및 금액은 모두 숨겨진다. 레일건이 토네이도 캐시와 가장 크게 구분되는 지점은 DeFi 통합이다. 레일건은 릴레이 어댑트(Relay Adapt)라는 중간 컨트랙트를 통해, 쉴디드 풀에서 자금을 꺼내 외부 DeFi 프로토콜과 상호작용한 뒤 결과 토큰을 다시 쉴디드 풀로 예치하는 과정을 단일 트랜잭션 안에서 처리한다. 예를 들어 쉴디드 풀 내의 DAI를 WETH로 스왑하는 경우, DAI가 일시적으로 언쉴드되어 유니스왑 같은 DEX에서 스왑된 후 결과 WETH가 즉시 쉴디드 풀로 예치된다. 어떤 토큰을 얼마만큼 스왑했는지는 체인에 공개되지만, 레일건 내 어떤 사용자가 이 스왑을 요청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프라이버시가 유지된다. 또한, 토네이도 캐시의 규제 사건을 목격한 레일건은 PPOI(Private Proof of Innocence)라 불리는 온체인 규제 대응 메커니즘을 도입했다. PPOI는 사용자가 쉴디드 풀에 입금할 때 해당 자금이 알려진 제재 주소나 도난 자금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PPOI 증명에 실패한 자금은 쉴디드 풀에 진입할 수 없다. 그러나 PPOI는 출처 증명에 한정된다. 자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검증하지만, 쉴디드 풀 내부에서 자금이 '어디로 갔는지'는 추적하지 않는다. 실제로 작년 업비트 해킹 자금 일부가 해커 연관 주소로 분류되기 전 레일건에 유입되면서 PPOI의 입구 단계 스크리닝을 통과한 뒤 쉴디드 풀 내에서 믹싱된 사례가 있다. 일단 PPOI를 통과해 풀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해당 자금의 이동 경로를 외부에서 추적하거나 감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레일건의 또 다른 한계는 성능이다. 모든 zk-SNARK 증명이 사용자 기기에서 생성되는 클라이언트 사이드 방식이라 단순 전송의 증명 생성에도 5 30초 이상이 걸릴 수 있다. 잔고 및 거래 내역 로드를 위해 온체인 이력을 모두 스캔해야 해 몇 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증명과 함께 제출되는 온체인 트랜잭션의 가스 비용도 1 MGas 이상으로 일반 전송 대비 매우 높다. 3.3 프라이버시 풀즈(Privacy Pools): 규제 적합 프라이버시의 이론적 프레임워크 2023년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과 아민 솔레이마니(Ameen Soleimani) 등이 공저한 "Blockchain Privacy and Regulatory Compliance: Towards a Practical Equilibrium" 논문이 발표됐다. 이 논문은 토네이도 캐시의 규제 사례의 교훈을 기반으로, 합법적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금이 불법 출처와 무관함을 증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image.png Source: 0xbow 논문이 도입한 핵심 개념은 연관 집합(Association Set)이다. 사용자가 프라이버시 풀에서 자금을 출금할 때, '내 입금은 이 연관 집합에 포함된 입금들 중 하나다'라는 사실을 ZK 증명으로 제출한다. 이 집합은 연관 집합 제공자(Association Set Provider, ASP)가 정의하며, ASP는 온체인 분석, 제재 목록, 규제 요건 등을 기반으로, 합법적이라고 판단되는 입금들의 목록을 관리한다. 사용자가 입금을 수행하면 ASP가 해당 입금이 악의적인 사용자로부터 이뤄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이를 허용하는 구조다. 2025년 3월 31일 옥스보우(0xbow)가 이 논문의 첫 실제 구현인 프라이버시 풀즈를 이더리움 메인넷에 출시했고, 비탈릭이 최초 사용자 중 한 명으로 직접 참여하며 주목을 받았다. 프라이버시 풀즈에 자금을 입금하면, 이를 다른 데로 보내기 전 ASP가 먼저 제재 주소 스크리닝을 수행한다. 만약 입금자가 제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면, 해당 입금은 임의 주소로의 출금이 거부되며 본인이 입금한 주소로만 출금이 가능하다. 임의의 주소로 출금 시, 사용자는 ZK 증명을 통해 자신의 입금이 ‘승인된 연관 집합에 포함됨’을 증명해야만 출금이 진행할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프라이버시 풀즈는 풀 내부에서 합법과 불법을 분리하고, ‘규제를 준수하는 토네이도 캐시’가 가능함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다만 실제 금융 인프라 관점에서 보면 세 가지 간극이 남는다. 첫째, 프라이버시 풀즈 역시 믹서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입금과 출금만 가능하며, 쉴드가 이뤄진 상태에서 다른 주소로 전송하거나 DeFi 프로토콜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옥스보우 팀은 V2 런칭을 통해 이 기능을 지원하려 하고 있으며, 현재 테스트넷 단계에 있다. 토네이도 캐시 혹은 레일건과 같이 클라이언트 사이드 ZK 증명의 성능 병목이 그대로다. 클라이언트 사이드 증명에 의존하는 한 해결되기 어렵다. ASP의 스크리닝은 '입금 시점'에 한정된다. 일단 풀에 들어간 자금에 대해서는 내부 이동을 추적하거나 감사하는 메커니즘이 없다. 4. 규제가 요구하는 것: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블록체인 프라이버시 기술의 발전사를 보며 각 세대가 무엇을 해결했고 어디서 멈췄는지를 살펴봤다.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한 프라이버시 기술들은, 규제 준수에 적극적인 형태라기보다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만족시키는 데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다. 기관이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자금을 움직이려면, 레일건의 PPOI나 프라이버시 풀즈의 연관 집합 그 이상의 규제 준수가 필요하다. 한 가지 먼저 정리하고 넘어갈 점은, 규제는 블록체인 프로토콜 자체가 아니라, 그 프로토콜을 사용하는 사업자를 규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관 채택 가능한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이라는 문제는 결국 이 사업자들이 법적 리스크 없이 쓸 수 있는 프로토콜인가로 귀결된다. 사업자의 관점에서 법이 그어놓은 선을 분해하면 세 가지 기준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사업자는 자기 고객의 거래를 본다. 2. 사업자는 감독당국의 요청에 응답한다. 3. 사업자는 개인정보 주체의 삭제/정정 요청을 처리한다. 이번 섹션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각각 분석하고, 이것이 규제 친화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본다. 4.1 사업자의 평문 접근 우선 가장 기본적인 전제 중 하나는, 사업자가 자기 고객의 거래를 알 수 없는 구조는 어느 관할권에서도 규제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AML 체계 전체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전제다. AML 규제는 사업자에게 세 가지를 요구한다: 고객 식별(KYC) 거래 모니터링 의심거래 보고 이 세 가지를 수행하려면 사업자가 자기 고객의 거래 상대방, 금액, 패턴을 평문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각국의 규제는 이 전제를 다음과 같이 구체화한다. EU : MiCA Article 68(9)과 이를 구체화한 Commission Delegated Regulation (EU) 2025/1140은 사업자의 거래 기록 보관을, TFR Article 14는 송수신자 정보 수반을, AMLR 2024/1624는 고객확인과 모니터링을 요구한다. 미국 : BSA 하의 CIP(고객식별프로그램), 5년 기록 보관 의무(31 CFR 1010.410), 30일 내 SAR 제출(1010.311)이 같은 골격을 구성하며, 2025년 7월 GENIUS Act는 승인된 스테이블코인 발행자(PPSI)를 BSA 상 금융기관으로 편입했다. 아시아 : 일본은 2024년 개정 범죄수익이전방지법이 CAESP와 EPIESP에 트레블 룰(Travel Rule)을 부과하고, 한국 특금법상 VASP는 2022년부터 트레블 룰을 이행한다. 싱가포르 MAS Notice PSN02는 S$1,500 이상, 홍콩 HKMA 가이드라인은 HK$8,000 이상 이전에 대해 동일한 의무를 둔다. 각 규제에서 표현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요구하는 것은, ‘사업자가 자기 고객의 거래를 평문으로 보고, 보관하고, 감독당국의 요청에 따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즉, 프라이버시 프로토콜 역시 ‘사용자만이 볼 수 있는 형태’의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는 형태로는 규제를 충족할 수 없다. 4.2 감독당국에 대한 응답 경로 각국의 규제가 두 번째로 요구하는 것은, ‘사업자는 권한 있는 법적 요청에 대해 자기 보관 기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 명령, FIU 요청, 세무당국 요청, 감독기관 검사 등 경로는 관할권마다 다양하지만 구조는 유사하다. EU : MiCA Article 94가 감독당국의 기록 요청 권한을 규정하고, RTS 2025/1140이 제공 포맷을 표준화하고 있다(ESMA가 2025년 11월 JSON 스키마 공표). 미국 : 경로가 세분화되어 있다. 일반 고객 기록은 대배심 소환장·행정 소환장·수색영장·National Security Letter·Section 314(a) 요청 등 각기 다른 절차로 요청되지만, SAR 지원문서만큼은 FinCEN과 법집행·감독기관의 요청에 대해 법적 절차 없이 즉시 제공되어야 한다(RFPA의 금융기관-정부 예외). 세무 조사는 IRS의 독자적 소환 권한(IRC §7602)이 작동한다. 아시아 : 한국 특금법 제11조, 일본 범죄수익이전방지법, 싱가포르 PSA, 홍콩 AMLO 등이 5년 이상 기록 보관과 FIU·수사기관·과세당국의 요청에 대한 자료 제출 의무를 규정한다. 각 규제에서 요구하는 것은, ‘사업자가 권한 있는 법적 요청에 대해 자기 보관 기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은 사업자가 필요한 시점에 평문 또는 복호화된 기록을 꺼낼 수 있는 응답 경로를 구조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4.3 트래블 룰의 이중성: AML 준수가 만드는 프라이버시 리스크 앞의 두 축은 사업자에게 '거래를 평문으로 보고 보관하라'는 요구를 공통적으로 부과한다. 그런데 이 요구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 구조 자체가, 블록체인 환경에서는 이후 살펴볼 개인정보 보호 축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리스크를 만들어낸다. 트래블 룰이 그 대표적 사례다. 트래블 룰은 FATF Recommendation 16에 기반해, VASP가 일정 임계값 이상의 이전에 대해 송신자와 수신자의 신원 정보(이름, 생년월일, 정부 발행 신분증 번호, 주소 등)를 상대방 VASP와 공유하도록 요구한다. EU TFR은 2024년 12월부터 암호자산 이전에 대해 제로 임계값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미국 FinCEN($3,000), 일본 FSA(2023년 6월), 한국 특금법, 싱가포르 MAS PSN02, 홍콩 HKMA 등 주요 관할권에 모두 도입되어 있다. 준수를 위해 각 VASP는 고객의 신원 정보와 지갑 주소를 연결한 매핑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및 유지해야 하고, 교차 VASP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이 매핑의 해당 부분을 상대 기관과 전송 프로토콜(TRISA, TRP 등)로 공유한다. 문제는 이 매핑이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갖는 의미가 전통 금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은행 간 송금에서 KYC 매핑 DB가 유출되더라도, 해당 고객의 실제 거래 내역은 각 은행의 내부 시스템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피해는 '이 사람이 이 은행 계좌를 갖고 있다'는 수준에서 제한된다. 반면 블록체인은 거래 원장이 공개되어 있고 영구적이다. 의사익명적 지갑 주소가 프라이버시를 성립시키는 유일한 조건은 '그 주소가 누구 것인지 모른다'는 것뿐인데, 유출된 매핑 한 줄이 이 조건을 즉시 무효화할 수 있는 것이다. 공격자는 매핑과 공개 원장을 결합해 해당 고객의 전체 온체인 거래 이력을 재구성할 수 있으며, 이는 특정 시점의 스냅샷이 아니라 주소가 폐기되지 않는 한 미래 거래까지 지속적으로 감시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또한 트래블 룰은 구조적으로 이 매핑의 복제를 강제한다. 고객이 여러 VASP를 이용할수록, 그리고 트래블 룰이 더 많은 관할권에 도입될수록, 동일한 신원과 지갑 간 매핑의 사본이 더 많은 사업자에게 분산 보관된다. 보안 수준은 사업자마다 크게 다르며, 매핑의 안전성은 가장 약한 고리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로 2025년 5월 코인베이스는 외부 공격자가 일부 고객 지원 인력을 매수해 고객의 이름, 주소, 연락처, 마스킹된 주민번호, 신분증 이미지, 계좌 잔액과 거래 이력 일부가 유출되었다고 공시한 바 있으며, 2020년 레저(Ledger) 이커머스 DB 유출은 27만 명 이상의 고객 주소 및 전화번호를 공개 포럼에 노출시켜 이후 일부 고객이 물리적 협박을 받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트래블 룰 확산은 이런 유출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의 수를 늘린다. 즉, 규제 구조상의 역설이 존재한다. 트래블 룰은 AML 축에서는 추적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준수 도구지만, 다음 섹션에서 다룰 개인정보 보호 축에서는 합법 사용자의 전체 재무 이력을 공개 원장에 연결시키는 구조적 리스크 요인이 된다. 트래블 룰이 글로벌하게 확산될수록 온체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한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공개 원장 위에서 KYC 매핑이 광범위하게 복제되는 상황에서 유출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거래 내역 자체를 공개 원장에 평문으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이 단순히 '사업자에게 평문 접근을 허용하는 경로'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의미한다. 사업자에게 열리는 그 경로가 공개 원장과 결합되었을 때 합법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추가로 침해하지 않도록, 온체인에는 개인정보와 거래 내역이 기본값으로 노출되지 않는 구조가 함께 요구된다. 4.4 개인데이터의 삭제 및 수정 경로 AML이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법의 관점에서, 각국 규제는 두 가지를 요구한다. 먼저 무엇이 개인데이터인지를 정의하고, 다음으로 그 개인데이터에 대한 정보 주체의 삭제 및 정정 요청에 응답할 경로를 확보하도록 한다. 이 축은 앞의 두 축과 성격이 다르다. 기록 보관 의무가 데이터의 지속성을 요구하는 반면, 삭제권은 소멸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삭제권은 블록체인의 불변성(immutability)과 상충되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기술적 불가능성이 개인정보법 면제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법의 일관된 입장이다. 무엇이 개인데이터인가 . 각국 법의 공통 골격은 "식별되었거나 식별 가능한 자연인에 관한 모든 정보"다. EU : GDPR Article 4(1)은 개인데이터를 "식별된 또는 식별 가능한 자연인에 관한 모든 정보"로 정의하고, 식별자의 예시로 이름, ID 번호, 위치 데이터, 온라인 식별자 등을 든다. Recital 30은 IP 주소, 쿠키 ID, 디바이스 식별자를 명시적으로 포함한다. 미국 : CCPA/CPRA는 "특정 소비자 또는 가구를 식별할 수 있는 합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정보"로 정의한다. 아시아 : 한국 개인정보 보호법 제2조, 일본 APPI, 싱가포르 PDPA, 홍콩 PDPO가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 + 다른 정보와 결합하여 식별 가능한 정보’라는 동일한 골격을 채택한다. 블록체인 맥락에서 이 정의의 구체적 적용은 EDPB Guidelines 02/2025와 AEPD 기술노트(2024)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문서에 따르면, 합리적으로 가능한 수단(데이터 유출, 온체인 분석, 거래소 KYC 정보와의 결합 등)으로 식별될 수 있는 한 지갑 주소와 공개 키 자체가 개인데이터에 해당하며, 트랜잭션 송·수신 계정과 금액, 계정 잔액, 스마트 컨트랙트 스토리지, 트랜잭션 영수증·이벤트 로그, 그리고 블록체인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IP 주소나 네트워크 메타데이터까지 모두 개인데이터가 될 수 있다. 고급 암호학적 도구로 식별자를 치환해도, 치환된 값 자체가 자연인과 연결 가능하면 여전히 개인데이터라고 볼 수 있다. 삭제 및 수정권의 적용 . 두 번째 요구는 위 정의에 해당하는 모든 데이터에 대해 정보 주체의 삭제, 정정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경로를 갖추는 것이다. EU : GDPR Article 17(삭제권), Article 16(정정권)은 정보 주체의 요청에 대해 컨트롤러가 부당한 지연 없이 데이터를 삭제/정정할 것을 요구한다. 미국 : 연방 포괄법은 없지만 CCPA/CPRA(California), VCDPA(Virginia) 등 주별 법이 같은 권리를 인정한다. 아시아 : 한국 개인정보 보호법 제36조, 일본 APPI, 싱가포르 PDPA, 홍콩 PDPO가 유사한 삭제 및 정정권을 규정한다. 블록체인의 불변성과 이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는 EDPB Guidelines 02/2025를 보면 유추해볼 수 있다. 원칙은 개인데이터 원본은 오프체인에 두고 블록체인에는 암호학적 참조만 올리는 것이다. 참조의 구체적 형태 중 가이드라인이 주목한 것은 암호학적 커밋먼트로, ‘완벽 은닉(perfectly hiding) 스킴으로 계산된 커밋먼트는 원본 데이터와 witness가 삭제되면 블록체인에 남아도 원본을 복구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즉 원본 삭제가 곧 온체인 데이터의 기능적 삭제가 된다. 다만 가이드라인이 이를 ‘Article 17 삭제권의 완전한 기능적 대체’로 확정한 것은 아니며, 최종본은 관찰이 필요하다. 각 규제에서 표현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요구하는 것은, '개인데이터에 해당하는 온체인 기록에 대해 컨트롤러가 식별 불가능화 경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프라이버시 프로토콜은 원시 개인데이터를 온체인에 직접 기록하지 않는 구조, 그리고 온체인에 올라가는 참조(커밋먼트/해시/식별자)에 대해 오프체인 원본의 삭제만으로 식별 불가능해지는 경로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해야 한다. 4.5 세 기준이 프로토콜에 남기는 것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준 1: 프로토콜이 ‘사업자가 자기 고객 거래를 평문으로 보거나 복호화할 수 있는 경로’를 갖추도록 요구한다. 기준 2: 프로토콜이 ‘권한 있는 법적 요청에 대해 사업자가 기록을 제공할 수 있는 경로’를 갖추도록 요구한다. 기준 3: 프로토콜이 ‘개인데이터가 온체인에 기록되는 경우 원본 입력의 오프체인 삭제만으로 온체인 데이터가 식별 불가능해지는 구조’를 갖추도록 요구한다. 이 세 가지를 구조적으로 만족하면 규제 진입의 최소 조건은 충족된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프로젝트들이 이 세 축에 대해 어떤 설계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어떤 트레이드오프를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5. 2026 프라이버시: 동형 암호화와 기관용 프라이빗 체인 지캐시에 영감을 받은 EVM 위의 ZK 기반의 프라이버시 프로토콜들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간 다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접근들이 다양하게 등장하였으며, 그 중 완전 동형 암호(FHE)와 기관용 프라이버시 체인이 가장 대표적이다. 5.1 FHE: 암호화된 채로 연산하기 5.1.1 개요 완전 동형 암호(Fully Homomorphic Encryption, FHE)는 데이터를 암호화된 상태 그대로 더하기, 곱하기, 비교 같은 연산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일반적인 암호화에서는 데이터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먼저 복호화해야 한다. FHE는 이 제약을 근본적으로 바꿔, 연산을 수행하는 서버나 노드조차 원본 데이터를 볼 수 없도록 만들며, 암호화된 데